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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의 교단일기

'전교조로부터 아이들을 구합시다?' 교사의 일상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호박꽃 선생님은 경기도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호박꽃의 교단일기'는 호박꽃 선생님이 교실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소소한 일상들과 그 속에서 부딪히는 고민들을 이야기로 풀어낼 예정입니다. 


지방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이야기다. 선거 휴일 뒤 출근길이 마치 월요일 출근길처럼 붐비고 더딘 날이었다. 그래도 내가 찍은 8장 중에 4장이 당선된 데다 우리 동네의 기초 의원은 1등으로 당선된 날이니 붐비는 출근길에도 너그러움이 솟아났다.


그런데 신호를 기다리며 바라본 선거 플랑카드 한 장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전교조로부터 아이들을 구합시다”라는 구호가 버젓이 적혀 있는 플랑카드였다. “전교조 반대” 정도의 구호였다면 개인의 가치관이니 그러려니 했을 터인데, 이건 완전히 전교조 교사들이 아이들을 악의 구렁텅이로라도 몰아넣는 존재라도 된다는 듯의 구호 아닌가.

그럼 그 사람이 보기에 전교조 조합원인 내가 만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전부 나에게서 구해내야 할 대상이란 말인가? 뭐 내가 이념 교육이라도 해서 우리 아이들을 물들일까봐 겁이 나는가?

사실 이념 교육이고 뭐고 할 시간이라도 있는 줄 아는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게 부끄러울만큼 그저 하루하루 일상에 쫒겨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의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잠깐 돌아보니 오늘도 종소리와 함께 말하는 기계 같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관 같고, 밀린 업무 처리를 해야 하는 사무원 같은 하루를 보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서 7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 도착, 오늘 해야 할 일과 각 학급의 수업 진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8시 20분에 교실에 들어가 8시 55분까지 아이들과 아침 시간을 보냈다. 지각한 아이들과 어제 청소 안하고 땡땡이 친 녀석들 확인하고, 자습지 나눠주고 교실 한바퀴 돌며 어수선한 아이들을 다독거리고,  여기저기서 나오는 아이들의 사소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질문들-하복 언제부터 입어요? 두발 복장 검사 오늘부터 해요? 등-에 대답하고, 밤새 무탈하게 모두 학교에 왔는지 눈 길 한번 맞추고.. 그러다 보면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늘도 차분하게 커피 한 잔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것은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학교
학교 by 피엡 저작자 표시비영리



그리고 9시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다행히 4시간 수업이 있는 날이다. 5일 중에 이틀이 5시간 수업을 하는데 오늘은 4시간이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날이다. 그리고 잠깐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학교운영위원회 심의에 올릴 안건을 의논하러 교감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서류를 만들었다.


참 중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여학생 화장실에 떼를 지어 들어가 있던 남학생 예닐곱명들을 불러다 벌을 주고 반성문을 쓰게 했고, 우리반 녀석들 두 명이 서로 분란이 일어나 한 녀석이 눈 위가 찢어져 불러다 확인하고 혼내고 수습했고, 또 여학생과 남학생이 낙서 지우는 독한 세제를 가지고 장난하다 얼굴과 옷에 튀는 바람에 여학생이 우는 상황이 생겨 불러다 얘기했고.... 이런 일이 하루에 몇 건씩 생기는 건 일상 다반사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인 나는 때로는 재판관이어야 하고, 때로는 다정한 엄마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선생님이어야 하고 때로는 잔소리꾼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이들을 집에 보내고 청소까지 끝내고 나서 밀린 잡무 처리와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잡무가 다른 날보다 적은 편이어서 그나마 학교에서 수업 준비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잡무가 많은 날은 학교에서 수업 준비를 거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으로 가지고 와서 밤 늦게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6시 40분쯤에 학교를 나섰다. 그래도 해가 길어져서 햇살을 맞으며 나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열심히 지낸 것 같기는 한데 뭔가 부족하고 빈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저 하루하루 지내는 일에 급급하여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