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귀가 아닌 공감이 필요해요
“말이 되요? 엄마가 자식 따귀를 때리는 게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기말고사 평균 80점 맞았다고 엄마가 따귀를 때려요. 학원도 다니는데 이게 뭐냐고요. 학교에서 수업 안듣고 뭐하냐면서요”
“속상했겠네. 엄마한테 얼굴을 맞았으니... 사실 성적이 기대만큼 안나와서 너 자신이 제일 속상할텐데 말이지. 근데 너 사실 수업 열심히 안듣긴 했잖아. 학원 아무리 다녀도 학교 수업 잘 안들으면 공부 잘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그래도 그렇죠. 밥먹다가 엄마가 머리통을 치는 거예요. 평균 80점 맞았다고요. 그래서 저도 화가 나서 화장실 벽을 쳤죠. 그랬더니 엄마가 따귀를 때려요.”
“엄마가 너한테 기대를 크게 하고 계셨는데 성적이 그렇게 나오니 화가 많이 나셨나보다. 오늘 집에 가서 엄마한테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지 못한 것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음부터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려봐.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머리를 때리고 따귀를 때려서 너도 많이 속상했다고 말씀드려봐.”
“그래 봤자 말이 안될 수도 있어요. 더 혼날 수도 있고요”
어제 학교에서 어떤 아이와 나눈 대화이다.
대안이라고 내놓은 마지막 내 말이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오히려 엄마가 먼저 사과하고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진 후에 엄마가 아이에게 원하는 바를 얘기해야 하는 게 맞을테니 말이다.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 처음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부모 모습의 아주 일부일 뿐일 것이다. 누구나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에게 기대를 하게 되고 기대에 못미칠 때 실망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80점을 맞았을 때 가장 속상한 건 아이 자신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은 건 생각을 못하고, 나름대로 학원에서 열심히 했으니까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이 때 “너도 속상하겠네. 힘들게 학원 다니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성적이 그렇게 나왔으니 말이야. 괜찮아. 다시 해보면 되니까”라고 일단 공감부터 하고 나서 성적이 잘 안 나온 원인에 대한 얘기를 풀어갔으면 어땠을까?
나를 포함하여 어느 부모가 이런 교과서적인 모범답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의미있는 타자인 부모이고 교사이기에 모범답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읽고 있는 책인 제러미 리프킨의『공감의 시대』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리비도에 의해 움직인다'고 본 프로이드의 이론을 비판한 윌리엄 페어비언과 하인츠 코후트의 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한 인간으로 사랑받고 싶고 그의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좌절되는 것, 그것이 아이가 겪게 되는 가장 큰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상처가 유아를 성적 관심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인간의 파괴성은 아이가 적절한 공감(강조하지만 최대의 공감이 아닌)에 비롯되는 반응을 원하는데도 자기대상(self object)이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경우에 나타난다.---공감이라는 매트릭스에서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을 잊을 때 부모와 교사의 욕심은 아이를 할퀴게 되고, 다시 아이는 다른 약자를 할퀴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도는 게 아닐까?